영화 케빈에 대하여 :: 모성애와 사이코패스의 관계 (결말 해석, 줄거리 스포O)

내 안에서 나를 닮은 타인이 태어난다는 것은 두렵고도 신기한 일이다. 나를 닮는다면 어떤 부분을 닮게될까? 내 테두리를 벗어난 전혀 낯선 아이가 태어나면 어떡해야 할까? 생명이 태어난다는건 축복할 일이지만 아직까지의 나는 경외감보다는 두려움이 더 크다. 누군지 모르는 미지의 존재를 내가 온전히 책임질 수 있을지, 정말 나에게도 다른 위대한 엄마들처럼 모성애라는게 있긴 한건지 궁금하고도 의문스럽다. 이 모든 두려움을 담은 영화 <케빈에 대하여>를 봤다.

 

영화 케빈에 대하여
영화 케빈에 대하여



넷플릭스에서 예전부터 찜해두었지만 왠지 보기가 두려웠다. 나의 통제를 벗어난 아이를 키운다는 것, 그 아이에 대해 책임을 져야한다는 것, 그런 아이에 대해서도 끝없는 모성애를 지녀야하는 것이 엄마라는 사실이 무섭고 두려웠다. 줄곧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엄마의 사랑이라는게 어쩌면 당연한게 아닐수도 있다는 사실. 행동에 문제가 있는 아이는 오롯이 엄마의 책임일까? 아닐까? 여러 불편한 질문과 의문들이 뒤엉킨 불편하고도 무서운 영화였다.

 

케빈에 대하여 줄거리

케빈에 대하여 스틸컷

케빈에 대하여는 주인공 에바(틸다 스윈튼)의 비참해보이는 생활로 시작한다. 낡은 집에서 혼자 일어난 에바가 집밖으로 나오자 바깥 벽이 온통 빨간 페인트로 엉망진창이고, 자동차에도 피로 보이는 붉은 액체가 잔뜩이다. 하지만 그녀는 묵묵히 자동차의 피를 닦아내고 동네의 초라한 여행사에 사무직 면접을 보러간다. 그녀는 아주 큰 죄를 지은듯 움츠려있고, 길가다 동네여자가 이유없이 뺨을 날리는 상황에서도 괜찮다며 급하게 자리를 피할 뿐이다. 도대체 어떤 죄를 지었길래 그녀의 삶은 이렇게 되었는가? 영화는 그녀의 현재 삶과 과거의 삶을 크로스하며 보여준다.

그녀는 사실 잘나가는 여행작가였다. 자유를 추구하며 프리하게 살던 그녀가 어느날 사랑하는 남자를 만나 의도치않게 아이를 가지게 된다. 갑작스럽게 시작된 임신과 출산, 누군가에게는 축복이고 행복일 순간이 그녀에게는 족쇄처럼 느껴진다. 그렇게 태어난 아이가 케빈이다. 케빈은 태어났을때부터 무척 예민하여 밤낮없이 울었고, 그런 아기를 정성껏 돌보려 해보지만 하는 수 없이 에바는 점점 지쳐간다. 에바는 아이에게 '니가 태어나기 전이 훨씬 행복했다'며 소리를 지르기도 하고, 너무나 심하게 우는 아이의 울음소리가 듣기싫어 유모차를 끌고 공사장의 시끄러운 소음 옆에 일부러 서있기도 한다. 아이는 커가면서 무엇 때문인지 유독 에바에게만 못되게 군다. 아빠에게는 세상 다정한 모습으로 대하면서 엄마인 에바에게만 자신의 진짜 표정을 드러내는 것이다.




여기까지 보자면 아이가 못되게 구는건 엄마의 모성애가 부족해서인 것 처럼 보인다. '아이에게 좀 더 다정했어야지', '엄마가 그런 소릴 하면 안되지', 모든걸 엄마탓으로 돌리는건 참 쉬운 일이다. 아빠에겐 그토록 다정한 아이가 아무도 모르게 엄마에게만 자신의 악의를 드러낸다. 에바는 남편에게 케빈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지만 아이탓을 하는거냐고 화만 돌아온다.

 

 

지금부터 스포있습니다.. !!


부부는 아이에 대한 생각의 차이를 좁히지 못하고 결국엔 이혼을 결정한다. 아빠가 케빈을, 엄마가 여동생을 맡기로 결정한 날 케빈은 모든 것을 끝내버리기로 결정한다. 지금까지 쓰고 있던 모든 가면을 이제 그만 벗어버리기로…
그는 아마도 사이코패스였던 듯 하다.
그렇게 에바의 모든 세계는 산산이 부서져내렸다. 아무것도 남기지 않고 모조리 다.


사람들은 자식을 잘못키운 어미의 탓이라며 모두들 에바를 손가락질 했다. 에바 또한 케빈에게 가족을 잃은 피해자였지만 동시에 케빈의 엄마라는 이유로 피의자였다. 그래서 에바는 속죄하는 의미로 마을에 남아 케빈이 출소할 때까지 사람들의 원망과 비난의 눈초리를 그대로 받아들이기로 했던 것 같다.



에바도 케빈이 분명 원망스러웠을 것이다. 가족인 아버지(남편)와 여동생(딸)을 죽인 것도 모자라 수많은 학생과 선생님을 하룻밤 사이에 학살해버린 아들을 무슨 수로 이해할 수 있을까. 케빈을 낳은 자신이  저주스러웠을 것도 같다. 하지만 에바는 포기하지 않고 2년동안 끈질기게 케빈을 면회한다. 서로 할말을 잃은 채 매번 마주앉은 두 사람의 모습이 답답하고 위태로워보였다. 그리고 2년째 되던 날, 드디어 에바가 묻는다. 

 

"도대체 왜 그랬어?" 
"몰라, 그땐 알 것 같았는데, 지금은 모르겠네. " 


아이에게 무척 화가 났을거라 생각했는데 뜻밖에도 에바는 케빈을 꼭 끌어안아준다. 언젠가 감옥에서 나오게 될 아이의 새출발을 위해 케빈의 방을 파란 페인트로 칠하고 깔끔하게 준비해둔다. 케빈을 다시 이해해보리라 노력하는 것이리라.

 

영화 케빈에 대하여

 

여기서 한번쯤 영화의 제목을 떠올려볼 필요가 있다. 한국에서는 <케빈에 대하여>라는 제목으로 개봉했고, 원제는 We need to talk about Kevin 이다. "우리는 케빈에 대해 얘기할 필요가 있다." 라는 뜻이다. 하지만 영화에서는 한번도 케빈이 왜그럴까에 대해서는 다루지 않는다. 케빈의 이상한 행동과 엄마와의 느슨하고 미적지근한 애정관계를 보여줄 뿐이다. 아빠와는 살갑게 잘 지내면서 엄마에게만 악의를 드러내는 아이, 그 이유를 모르는 엄마. 그 불편한 줄다리기를 관객도 불편한 마음으로 지켜봤을 뿐이다.

 

케빈은 어쩌면 엄마에게만 솔직할 수 있었던 것 아닐까. 자신의 마음속에 꿈틀거리는 악의와 폭력적 성향을 유일하게 엄마에게만 마음놓고 보여줄 수 있었던건 아닐까. 어쩌면 자신의 이상함에 대해 지속적으로 신호를 보냈던 것일수도. 자신을 있는 그대로 드러낼 수 있었던 세상의 단 한사람 엄마와 더이상 같이 살 수 없다고 생각한 순간, 엄마 외의 모든 것을 파괴하기로 마음먹었던 것은 아닐지. 

 

영화는 모성애가 문제인지 아닌지를 따지는듯 보이다가 결국엔 무엇이 문제인지 똑바로 봐야한다고 말하는 것 같다. 아이의 상태를 똑바로 보려고 노력한 사람이 아무도 없었던 것이다. 아빠는 아이와 잘 놀아주긴 했지만 아이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고, 엄마는 아이의 이상한 점을 발견하긴 했지만 결국은 이혼함으로서 포기하려 했다. 그게 이 모든 비극의 원인이 아니었을까. 가장 중요한 문제를 덮어두고 보려하지 않을때 벌어질 수 있는 가장 최악의 비극. 영화 제목에서부터 너무나 노골적으로 케빈에 대해서 얘기해야한다고 말하지만 우리의 시선은 엄마가 뭘 잘못했는지를 자꾸만 찾고 있었다. 

너무 어렵고도 암울한 영화였다. 정해진 답이 있는 이야기가 아니라, 어디에 포커스를 맞추느냐에 따라 얼마든지 다른 결론을 낼 수 있는 영화인듯 하다. 이런 영화는 여럿이서 보고 토론해보는 것도 재밌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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