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끗한 존경》이슬아 인터뷰집 :: 사랑과 용기가 담긴 인터뷰들
- 글쓰기 공방/독서 리뷰
- 2021. 5. 23.
내가 얼마나 내 안에 갇혀 있는지 알아차릴 때마다 떠오르는 목소리들이 있었다. 문장으로 된 목소리였다. 아무 소리 나지 않아도 선명하게 들려왔다. 더 가까이에서 보고 듣고 싶었다. 그 마음과 그 얼굴로부터 배우고 싶었다. 내가 나에게 들려주는 이야기로는 충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리에서 일어나 그의 맞은편에 앉아보았다. 이것은 그렇게 마주본 네 사람에 관한 책이다. 네 사람이 유심히 바라본 존재들을 향하는 책이기도 하다. 무엇보다도 나의 감탄과 부끄러움을 숨길 수 없는 책이다.
스스로에게 갇히는 날이 또 온다면 이 대화들을 다시 떠올릴 것이다. 그들의 이야기를 기억하며 마음의 세수를 한다. 이 느낌을 나는 존경이라고 부르고 싶다. 먼지 한 톨 없이 깨끗한 존경의 순간이 얼마나 희귀한지를 안다. 깨끗한 축하와 깨끗한 용서만큼이나 흔치 않다. 여전히 나는 그들의 아주 일부만을 알지만 그들이 들려준 이야기의 찬란함은 의심하지 않는다.
<깨끗한 존경> 서문 중에서
누군가에게 깨끗한 존경의 마음을 가진다는건 얼마나 아름다운 마음인가. 의심이나 질투없이 그들이 들려주는 이야기의 찬란함을 믿어 의심치 않는 것. 그리고 내 안에 갇힌 나를 끄집어내어 그들 앞에 마주앉는 것. 그런 깨끗한 마음으로 누군가를 마주하고 싶다.
<깨끗한 존경>에서는 정혜윤, 김한민, 유진목, 김원영 네사람의 인터뷰를 담았다. 대부분 이전 글들을 통해 이슬아 본인이 존경하고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꾸준히 말한 바 있는 사람들이었다. 글이 안써질 때마다 자기 서재에 만들어져있는 '정혜윤 코너'에 가서 그녀의 책을 들춰보며 다시 글쓸 힘을 얻고, <아무튼, 비건>을 쓴 김한민을 통해서는 실제로 비건이 되었다. 유진목의 <식물원>이란 시집과 <디스옥타비아>라는 소설은 죽을때가 왔을때 자기 손에 들려있었으면 하는 책이라고 말한다. <실격당한자를 위한 변론>이라는 책을 쓴 장애인 변호사이자 작가 김원영을 통해서는 차별없는 사회란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해보기도 한다.
정혜윤 : 그러니까 저는, 사람들이 슬프고 외로운 날에 기억할 수 있는 이야기가 있었으면 좋겠어요.
이슬아 : 나보다 더 슬픈 사람의 이야기요?
정혜윤 : 그 뜻이 아니에요. 그냥 세상에 나보다 슬픈 사람이 있다는 걸 기억하자는 게 아니에요. 누군가가 나보다 슬픈데, 그가 엄청난 용기를 내어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자는 것이지요. 용기를 말하는거예요. 저 스스로한테 얘기해요. 저 사람들이 내는 용기를 봐라. 저 사람들이 내는 저 큰마음, 저 멀리가는 마음을 봐라. 그러고서 생각해요. 저기로 같이 가자고. 저 방향이라고.
<정혜윤 인터뷰 중에서>
이슬아 : 한민 씨가 <아무튼 비건>에서 인용했던 철학자 레비나스의 말이 인상적이었어요. '얼굴의 윤리학'에 대하서 이야기하셨지요. "얼굴은 하나의 명령'이라고요. 얼굴이 하는 말. "나를 사랑하라. 나를 죽이지 마라, 형제여, 자매여..." 모든 얼굴이 그렇게 말한다고요. 그러므로 얼굴 있는 것을 먹는 꺼림칙함을 우리는 본능적으로 안다고 쓰셨어요. 우리가 먹는 음식도 한떄 얼굴이 있었떤 존재라는 걸 환기하게 돼요.
김한민 : 그런 말 있잖아요. "얼굴보고 말해." 진짜 강력한 말이에요. 어떤 존재들끼리 눈과 눈이 마주치면 도저히 할 수 없는 말과 행동들이 있거든요. 우리가 동물의 얼굴들만 인식해도 완전히 달라지죠.
이슬아 : 그래서 얼굴 있는 것들은 먹지 않으신다고요.
김한민 : 네, 최소한.
<김한민 인터뷰 중에서>
이슬아 : 관심을 가지는 정도가 아니라 압도당했는데요. 다보고 나서 '꼭 이 사람이랑 무언가를 같이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동시에 제가 가져온 몸에 대한 관심이 얼마나 '정상적'이라고 불리는 신체에 국한되어 있는지도 실감했고요. 다른 몸에 대해 학습할 기회가 별로 없었고 그래서 무지한 것 같아요. 장애인을 만날 때면 실수를 할까 봐 걱정을 많이 했어요. 무례한 실수, 혹은 무례하지 않으려고 애쓰다가 오히려 더 무례해지는 실수를 저지를 것 같아서요. 무식이 탄로 날까 걱정하는 마음이 늘 앞섰어요. 그런데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을 읽고 한 발짝 더 나아가 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어요. 친구가 되고 싶은 마음, 우정을 바탕으로 일면 함부로도 말할 수 있고 농담도 하고 싶은 마음이요. 차근차근 해보겠습니다.
<김원영 인터뷰 중에서>
장애인에 대해 너무 모르는 탓에 무례해질까봐, 혹은 무례하지 않으려 애쓰다 더 무례해질까봐 걱정했다는 이슬아의 솔직한 시작이 좋았다. 비장애인의 입장에서 장애인과 함께 장애에 대해 깊은 논의를 한다는 것이 어려울 법도 한데, 오히려 한발짝 나아가 친구가 되어 농담도 할 수 있을 정도로 있는 그대로 사실을 받아들여보고 싶다는 뜻으로 읽혔다. 그 덕에 장애와 장애인에 대해 한번도 생각해 보지 못했던 관점이 담긴 대화를 통해 많이 생각해볼 수 있는 기회였다.
사실 이번 인터뷰집에서 가장 의외의 인물이자 흥미로웠던 인물은 유진목 작가였다. 작가에 대한 사전 정보가 거의 없기도 했고, 사실 얼마전까지는 이름 때문이었는지 남자작가라고 생각했었으니까. 두 사람은 유일하게 이슬아의 집에서 편안하게 다과를 먹으며 인터뷰를 했는데 그래서 그런지 가장 편안하고 내밀하고 솔직한 얘기들이 많이 오간 인터뷰였다. 작가의 본명은 유진, 거기에 목(나무木)을 성으로 쓰고 싶어 목유진으로 필명을 하려고 했다. 어느날 필요에 의해 영어식으로 '유진 목' 이라고 어딘가에 소개를 써놓았는데. 어찌하다보니 사람들이 부르는 이름이 '진목씨'가 되고, 다시 설명하기도 귀찮아 그대로 유진목이 필명이 되었단다. 참 시적인 이름이라 생각했는데, 사실은 유진이 이름이었을 줄이야.
유진목 작가와의 인터뷰는 어느 한 곳을 딱 찝어서 발췌하기 어려울만큼 다양하고 깊고 진솔한 이야기가 담겨있다. 페미니즘, 미친사랑, 불우했던 과거, 현재의 행복, 거침없음, 내려놓음 등 작가의 삶 자체가 슬프고 흥미로운 이야기 그 자체였다. 책을 읽다 눈시울을 붉히며 알라딘을 켜서 유진목 작가의 책을 바로 검색했던 기억이 난다.
유진목 : 엄마에게 셔터를 내리기는 했지만 가장 슬픈 존재인 것 같아요. 안됐어요. 내가 더 잘살수록 그래요.
이슬아 : 잘 살수록...?
유진목 : 못 살 때는 다 같이 못사니깐 괜찮은데 지금은 내가 내 마음에 들고, 전보다 훨씬 건강하고, 많은 사람들 앞에 서도 부끄럽지 않잖아요. 엄마는 아마도 그러지 못할 거거든요. 혼자 힘들게 있을 텐데 내가 그걸 어떻게 마주해야 하나 싶어요. 그래서 <교실의 시> 원고를 못 쓰겠다고 했어요. 결국 썼지만, 가끔 그런 생각을 해요. 내 글을 읽으면 엄마가 얼마나 상처를 받을까. 하지만 흘러가는 삶을 제가 다 통제할 수가 없어요. 이제는 엄마가 어디에 있는지 잘 모르겠어요. 물리적인 공간이 아니라 그 사람의 정신과 마음이 어디에 있는지 점점 모르겠는 거예요. 제 삶이 나아지면 다시 만나야지 생각했는데 오히려 너무 행복하니까 만날 수가 없어요. 그래서 지금은 엄마가 안 죽었으면 좋겠어요. 이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서.. 그래서, 엄마를 인터뷰해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이슬아 : 쉽지 않을 것 같아요.
유진목 : 마음의 준비가 안 될 것 같아요.
이, 유 : (눈물 닦으며 웃음)
유진목 : 이놈의 엄마! 그래서 제가 <일간 이슬아 수필집> 읽을 때 좋았던 거예요. 딸이랑 엄마가 계속 무언가를 주거니 받거니 하는게 너무너무 좋았어요. 가상 체험처럼.
이슬아 : 오히려 더 버겁거나 슬프지는 않으셨어요? 선생님한테는 없었던 행운이니까 괜히 송구스러운 마음이에요.
유진목 : 그런 시기는 지났어요. 예전에 친구들이 다들 저보다 상황이 나았다고 말씀드렸죠? 열등감을 심하게 지닌 적이 한때 있었어요. 그런데 그 열등감을 계속 가진 채로는 내가 양지의 삶을 살 수 없겠더라고요. 돈이 있고 없고를 떠나서 정신적으로 양질의 삶을 살 수 없겠다는 느낌이요. 그래서 좋아하기 시작했어요. 남의 좋은 것을 저도 좋아하기 시작한 거예요. 그걸 좋아하기로 마음을 연습했어요. 그랬더니 되게 좋더라고요. 제 옆에 좋은 사람들도 많이 생겨나더라고요.
<유진목 인터뷰 중에서>
유진목 작가는 인터뷰 초반엔 좀 무심한 사람인가 라고 생각했는데 이야기가 거듭될수록 그 마음 안에 깊은 우물이 있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어두운 우물 안에서 물을 길어 아름답고 슬픈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작가.
자기 스스로의 신이 되는 일에 대해 나는 자꾸 생각했다. 우리 각자에게는 아주 작은 전지전능함이 있다. 겨우 그것만 있거나, 무려 그것이 있다. 선생님이 소심한 전지전능이라고도 말했던 그것.
한 집에 있기 좋은 사람이 되는 것. 남의 좋음을 나도 좋아하는 사람이 되는 것. 혼자서도 잘 있는 사람이 되는 것. 스스로의 보호자가 되는 것. 그러다 혼자가 아닌 사람이 되는 것. 사랑하는 이의 이름을 망설임 없이 부르는 것. 노브라로 무대에 서는 것. 미래의 내 눈으로 지금의 나를 보는 것. 닮고 싶은 사람들의 모습을 따라 밥을 먹는 것. 사랑 속에서 아무에게도 설명할 필요가 없는 낮과 밤을 보내는 것. 기쁨과 슬픔이 하나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 셔터를 내리는 것. 떠나는 것. 불행한 시간에 굴복하지 않는 것. 때로는 삶에 대해 입을 다물며 그저 계속 살아가는 것. 울다가 웃는 것.
이런 성취들을 나는 '작은 전지전능'이라고 부르고 싶다. 유진목 선생님의 힘을 빌려 나도 나를 위한 신이 되어간다.
<유진목 인터뷰 마무리글 중에서>
사실 이슬아 작가의 인터뷰글의 매력을 발견한건 '이스라디오'라는 이슬아가 예전에 진행했던 라디오 방송에서 우리가 알지 못하는 평범한 사람들을 인터뷰하고 쓴 글을 듣고 나서였다. 병원 청소부 아주머니와 친구 어머니등을 인터뷰한 글이었는데 그 평범한 대화에서 진짜 '깨끗한 존경'의 느낌을 받았던 것 같다. 글의 감동만을 따지자면 그 쪽이 더 크지 않았을까.
혹시 이슬아의 글을 읽어본 적이 없는 분은 팟캐스트에서 '이스라디오'를 검색해서 이슬아가 자신이 쓴 글을 직접 읽어주는 이 프로그램을 들어보기 바란다. 사실 어느순간 핫하게 떠오른 스타같은 느낌의 작가라 처음엔 크게 관심이 없었는데 여기서 직접 쓴 글들을 읽어주는 걸 듣고 너무 좋아서 팬이 됐다. 그때부터 이슬아 작가가 쓴 많은 책들을 계속해서 읽어나가고 있다. 이미 좋은 글을 쓰고 있음에도 꾸준히 자신을 성찰하며, 또한 매일 글쓰는 체력을 기르기 위해 운동도 열심히 하는 이슬아 작가에게 상큼하고 깨끗한 존경을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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