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너》존 윌리엄스 :: 불행과 고독 속에서 나로 산다는 것

윌리엄 스토너는 1910년, 열아홉의 나이로 미주리 대학에 입학했다. 8년 뒤, 제1차 세계대전이 한창일 때 그는 박사학위를 받고 같은 대학의 강사가 되어 1956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강단에 섰다. 그는 조교수 이상 올라가지 못했으며, 그의 강의를 들은 학생들 중에도 그를 조금이라도 선명하게 기억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스토너> p.8 시작하는 첫 문장

 

스토너 :: 존 윌리엄스


이 소설은 '윌리엄 스토너'라는 인물의 평생에 관한 소설이다.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열아홉이 되던 날까지 농사만 지었던 스토너는 어느 날 아버지의 권유로 농대에 진학하게 된다. 교양수업을 듣다가 뜻밖에 문학이라는 학문에 푹 빠지게 되어 평생을 학자이자 교육자로 살아가는 인물이다. 그의 '평생'이 이 소설에 담긴 이야기의 전부인데도 첫 문장부터 그의 모든 인생을 한 두문장으로 미리 요약해버리고 소설을 시작한다. 이 문장으로만 본다면 스토너란 사람은 참 별 볼 일 없는 평범한 사람처럼 보인다. 그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이 소설은 그의 시간을 19살부터 65세에 죽는 순간까지 차례로 따라가며 그의 인생에 닥쳤던 불행과 환희와 버티는 시간들을 끈덕지게 보여준다.



이 소설을 구입한 건, 몇 년 전 이 책에 대해 극찬이 자자한 리뷰들을 보고 나서였다.

위대한 소설이라기보다 완벽한 소설이다. 이야기 솜씨가 워낙 훌륭하고 글이 아름다우며, 감동적이라서 숨이 막힐 정도다.
- 뉴욕 타임스 -
전 세계 출판 시장을 통틀어 가장 놀라운 베스트셀러는 단연 존 윌리엄스의 고전 소설 <스토너>이다.
- 퍼블리셔스 위클리 -


이 외에도 이 책에 대한 수많은 극찬이 책 앞면에 실려있다. 스토너는 1965년에 출판되었다가 쥐도 새도 모르게 절판된, 소위 말해 망한 소설이었다. 그러던 소설이 2006년쯤 다시 재출간된 후 유럽을 시작으로 갑작스럽게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된다. 무려 40여 년 이란 시간을 넘어 역주행의 신화를 쓴 것이다. 어떤 부분이 세계인의 마음을 그토록 울린 것일까. 우리나라엔 2015년에 번역되어 출간되었고 역시나 많은 사랑을 받았다. 나는 책을 사서 책장에 처박아두었다가 2021년이 되어서야 읽기 시작했지만.



하지만 독서를 시작하고 3 챕터 정도까지 읽고 나자 고개를 갸우뚱했다. 너무나 정적인 방식으로 차례대로 주인공의 삶을 나열하듯 알려주는 소설의 방식이 재미없기도 했고, 답답했다. 퍽퍽한 닭가슴살을 소스도 없이 입에 욱여넣는 기분이랄까, 좋다고 하니까 먹긴 먹는데 맛없는 느낌. 그래서 다른 사람들 리뷰도 찾아보고 관련 팟캐스트도 찾아들었다. 이 소설은 끝까지 읽어야만 책을 덮고 나서 묵직한 감동이 찾아온다는 소리에 잠자코 읽어보기 시작했다.



스토너는 자신이 좋아하는 문학으로 교수가 된 것 이외에는 거의 모든 면에서 실패했다고 봐도 될 정도로 무기력하고 불행해 보이는 삶을 살았다. 첫눈에 반한 여자(이디스)와 결혼했지만 이디스의 불완전한 정신상태 때문에 그의 행복은 한 달이 못가 끝나버렸고, 예쁘고 똑똑했던 딸은 엄마의 히스테리 때문에 커서 알코올 중독자가 된다. 새롭게 만난 가슴 떨리는 연인과도 이루어질 수 없었고, 학교에서는 그를 싫어하고 음해하는 동료 교수가 스토너를 끝없이 괴롭힌다. 이 모든 악조건 속에서도 스토너는 오로지 버티는 삶을 선택한다. 왜 저러나 싶을 정도로 바보같이 묵묵하게 그 자리를 지킨다. 심지어 가끔은 행복하다고 생각하면서.

 

젊다 못해 어렸을 때 스토너는 사랑이란 운 좋은 사람이나 찾아낼 수 있는 절대적인 상태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어른이 된 뒤에는 사랑이란 거짓 종교가 말하는 천국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재미있지만 믿을 수 없다는 시선으로, 부드럽고 친숙한 경멸로, 그리고 당황스러운 향수로 바라보아야 하는 것, 이제 중년이 된 그는 사랑이란 은총도 환상도 아니라는 것을 조금씩 깨닫기 시작했다. 사랑이란 무언가 되어가는 행위, 순간순간 하루하루 의지와 지성과 마음으로 창조되고 수정되는 상태였다.
<스토너> p. 274


책을 읽어 내려가면서 초반에 퍽퍽한 닭가슴살을 먹는 것 같았던 답답한 기분의 정체를 알 것 같았다. 삶을 살아가는 방식과 유사하게 하루하루를 그려낸 소설은 우리네 재미없는 삶과 닮았고, 그건 극적인 이야기를 추구하는 소설의 방식과는 전혀 달랐다. 하지만 책장을 덮을 때쯤에는 촉촉하고 담백한 식빵을 뜯어먹는 기분으로 마무리된 것 같다. 여전히 자극적인 맛은 없지만 한 사람의 인생을 처음부터 끝까지 같이 살아보는 듯한 경험을 하면서 '잘 산다는 것이 무엇인가', '다른 사람의 시선이 아닌 오로지 나 자신으로서의 행복은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게 됐다. 죽는 순간, 눈을 감는 마지막까지 남는 것은 결국 나 자신밖에 없으니까.

 

그는 고개를 돌렸다. 협탁 위에 오랫동안 손도 대지 않은 책들이 쌓여 있었다. 그는 잠시 손으로 책들을 만지작거렸다. 가늘어진 손가락, 관절의 섬세한 움직임이 놀라웠다. 그 안의 힘이 느껴져서 그는 탁자 위에 어지럽게 쌓여있는 책 더미에서 손가락으로 책 한 권을 뽑아냈다. 그가 찾고 있던 그 자신의 책이었다. 손에 그 책을 쥔 그는 오랫동안 색이 바래고 닳은 친숙한 빨간색 표지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

이 책이 망각 속에 묻혔다는 사실, 아무런 쓸모도 없었다는 사실은 그에게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이 책의 가치에 대한 의문은 거의 하찮게 보였다. 흐릿하게 바랜 그 활자들 속에서 자신의 모습을 찾게 될 것이라는 환상은 없었다. 하지만 부정할 수 없는 그의 작은 일부가 정말로 그 안에 있으며, 앞으로도 있을 것이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스토너> p. 391


책 속에 나오는 저 빨간책이 이 책 <스토너> 아니었을까. 작가 존 윌리엄스는 <스토너>(1965년)를 쓰고 30여 년 뒤 세상을 떠났다. 1994년에 눈을 감았으니 자신의 책이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되기 10여 년 전에 죽은 것이다. 그가 죽기 전에도 30년 전 출판되어 망각 속에 묻힌 스토너를 쓰다듬었을까? 이 구절은 작가가 자신의 죽는 순간을 미리 내다보고 쓴 부분처럼 약간은 소름이 돋는다. 책 속의 윌리엄 스토너는 사실은 작가 자신이 아니었을까.

 

"나는 그가 진짜 영웅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소설을 읽은 많은 사람들이 스토너의 삶을 슬프고 불행한 것으로 봅니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그의 삶은 아주 훌륭한 것이었습니다. 그가 대부분의 사람들보다 나은 삶을 살았던 것은 분명합니다.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그 일에 어느 정도 애정을 갖고 있었고, 그 일에 의미가 있다는 생각도 했으니까요. "

<스토너> 옮긴이의 말 중 작가"존 윌리엄스" 인터뷰 글 중에서

 


마지막 페이지를 다 읽고 첫 페이지를 다시 펴보는 순간 삶의 전부를 말하는 것 같았던 그 문장들이 사실은 아무것도 아니었음을 알게 된다. 진짜 인생은 겉으로 보이는 평판과 고작 몇 문장으로 정의될 수 있는 게 아니므로.

그제야 왜 작가가 그토록 답답하다 싶을 만큼 끈덕진 방식으로 스토너의 삶을 시간순으로 하나하나 훑어내려 갔는지 되돌아본다.

 

읽기의 말들 :: 책덕후의 찬란한 독서 예찬

 

읽기의 말들 :: 책덕후의 찬란한 독서 예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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