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밝은 밤》 최은영 :: 슬픔의 근원을 찾아 거슬러 올라가다

"내게는 지난 이 년이 성인이 된 이후 보낸 가장 어려운 시간이었다. 그 시간의 절반 동안은 글을 쓰지 못했고 나머지 시간 동안 <밝은 밤>을 썼다. 그 시기의 나는 사람이 아니었던 것 같은데, 누가 툭 치면 쏟아져 내릴 물주머니 같은 것이었는데, 이 소설을 쓰는 일은 그런 내가 다시 내 몸을 얻고, 내 마음을 얻어 한 사람이 되어가는 과정이었다."

<밝은 밤> 작가의 말 중에서

소설을 읽기 전에 보게 된 작가의 말 때문이었는지, 소설을 읽는 내내 소설의 화자인 '이지연'의 얼굴로 최은영 작가 얼굴이 떠올랐다. 어느 책 낭독회에서 만났던 최은영 작가는 둥글고 선한 얼굴 뒤에 슬픈 그림자가 숨어있는 얼굴 같았다. 그 뒤에 어떤 상처와 슬픔이 있는 걸까 궁금했는데 이번 책을 읽으면서 그 마음 한 켠을 조금 엿본 것 같은 느낌도 든다. 스스로가 툭 치면 쏟아져 내릴 것 같은 물주머니 같았다가 책을 쓰면서 다시 몸을 얻고 마음을 얻어 한 사람이 되었다는 이야기는 책을 다 읽고 나니 정말 그랬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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밝은 밤 , 최은영
밝은 밤, 최은영

 


소설 밝은 밤의 줄거리

소설 《밝은 밤》의 화자인 '나'는 남편과 이혼 후 서울 생활을 정리하고 혼자 차를 끌고 희령이라는 곳에 도착한다. 희령은 내가 어릴적 외할머니와 10일 정도 함께 지낸 기억이 전부인 곳이다. 할머니와 밤하늘의 쏟아지는 은하수를 보고 말을 잇지 못했던 기억이 있는 곳이다. 나는 희령의 천문대에서 연구원으로 일한다. 

어떤 말은 듣는 순간 영원히 잊히지 않으리라는 걸 알게 한다. 내게는 엄마의 그 말이 그랬다. 엄마는 내게 전화를 해서 나의 이혼으로 엄마가 얼마나 힘든 상황인지, 얼마나 괴롭고 우울한지 호소했다. 심지어 내 전남편에게 연락해서 그의 행복을 빌어주기까지 했다고 말했다. 엄마의 눈에는 나의 고통이 보이지 않는 것 같았다. 

나는 사람들이 남자에게 쉽게 공감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사람들이 우리의 이혼을 언급하며 나를 욕했듯이, 그가 바람피웠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들조차도 그가 바람피우는 계기를 만들었을 나를 상상하며 비난했듯이. 그러나 엄마마저도 자신의 딸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아들에게 공감하고 나의 고통을 외면했다는 사실에 나는 무너졌다. 

<밝은 밤> p.18

 

남편의 바람으로 이혼하게 된 '나'는 귀책사유가 없음에도 엄마와 아빠로부터 오히려 가해자 취급을 받는다.  가장 가깝다 여겼던 가족으로부터 이해받지 못하는 경험은 이혼 자체보다 더 큰 상처가 되었다. 

 

마음이라는 것이 꺼내볼 수 있는 몸속 장기라면, 가끔 가슴에 손을 넣어 꺼내서 따뜻한 물로 씻어주고 싶었다. 깨끗하게 씻어서 수건으로 물기를 닦고 해가 잘 들고 바람이 잘 통하는 곳에 널어놓고 싶었다. 그러는 동안 나는 마음이 없는 사람으로 살고, 마음이 햇볕에 잘 마르면 부드럽고 좋은 향기가 나는 마음을 다시 가슴에 넣고 새롭게 시작할 수 있겠지. 가끔은 그런 상상을 하곤 했다. 

p.14

그 곳에서  어릴 적 이후 교류가 끊어졌던 외할머니를 우연히 만나게 된다. 아는 사람 하나 없는 타지 희령에서 나는 나의 엄마를 낳아준 사람인 외할머니와 다시 조심스러운 교류를 시작한다. 그리고 외할머니와의 대화를 통해 외할머니를 낳아준 증조모, 고조모의 이야기까지 거슬러올라가 그녀들이 겪었던 인생 이야기를 듣게 된다.

증조할머니, 고조할머니라는 일반적인 단어에는 도저히 담기지 않는 그들의 생생하고도 고단한 삶은 오랜 시간을 넘어 나의 삶과도 연결된다. 한 번도 만난 적 없지만 분명 나와 연결되어 있는 사람들의 삶을 통해 지금 내가 받고 있는 상처와 아픔, 엄마와 외할머니의 관계, 나와 엄마의 관계가 왜 이렇게 되었는지 더듬어볼 수 있게 된다.  

 

엄마는 나를 보며 무안한 듯 웃어 보였다. 그런 엄마가 예전처럼 가깝게 느껴지지 않았다. 나를 보는 엄마의 표정에서 엄마 또한 내게 거리감을 느끼고 있다는 걸 알아챌 수 있었다. 예전처럼 며칠씩 서로 말도 붙이지 않을 정도로 신경전을 벌일 만한 일이 우리에게는 더 이상 없었다. 큰 불이 나기 전에 꺼버렸고, 상대에게 작은 불씨를 던졌다는 것에 문득 무안해지기도 하는 사이가 된 것이었다.

그건 우리가 그만큼 친밀한 사이가 아니라는 뜻이기도 했다. 서로에게 큰 상처를 입혔다가 돌이킬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우리는 눈빛으로 공유하고 있었다. 우리는 더 이상 끝까지 싸울 수 없는 사이가 되었다. 정말 끝이 날까 봐 끝까지 싸울 수 없는 사이가. 우리는 싱거운 이야기를 나누면서 산을 내려왔다. 

p. 136

 

슬픔의 근원을 찾아 거슬러올라가다

소설은 나와 외할머니의 대화 속에 과거의 엄마, 외할머니, 증조할머니, 고조할머니의 이야기가 액자처럼 들어가 있는 방식이다. 가부장적이고 이기적인 남편과 결혼한 여자들의 상처와 고단함은 대를 이어가며 점차 모양을 바꿔 나에게까지 이어져내려온 것이다. 그렇게 방향을 모른 채 상처 받아 슬픈 물주머니 같던 내 삶은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그녀들의 삶을 하나하나 살펴보는 과정에서 조금씩 이해로 바뀌어간다. 엄마와의 관계, 내 슬픔과 공허함의 정체까지도. 

언제부터였을까. 삶이 누려야 할 무언가가 아니라 수행해야 할 일더미처럼 느껴진 것은. 삶이 천장까지 쌓인 어렵고 재미없는 문제집을 하나하나 풀어나가고, 오답 노트를 만들고, 시험을 치고, 점수를 받고, 다음 단계로 가는 서바이벌 게임으로 느껴진 것은. 나는 내 존재를 증명하지 않고 사는 법을 몰랐다. 어떤 성취로 증명되지 않는 나는 무가치한 쓰레기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했다. 그 믿음은 나를 절망하게 했고 그래서 과도하게 노력하게 만들었다. 존재 자체만으로도 의미와 가치가 있는 사람들은 자기 존재를 증명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애초에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p.156

 

화자인 나, 지연은 그리고 작가 최은영은 소설 속에서 자신이 가진 거대한 슬픔과 외로움의 시작점을 찾아 헤맨 것 같다. 엄마와의 관계에서 상처 받고 서운한 나를, 나조차도 내가 뭘 원하는지 잘 모르는 상황의 원인을 찾아가는 과정이 아마 이 소설 아니었을까 싶다. 

 

인간이 측량할 수 없는 무한한 세계가 지구 밖에 있다는 사실은 나의 유한함을 위로했다. 우주에 비하자면 나는 풀잎에 맺히는 물방울이나 입도 없이 살다 죽는 작은 벌레와 같았다. 언제나 무겁게만 느껴지던 내 존재가 그런 생각 안에서 가벼워지던 느낌을 나는 기억했다. 무리를 이루는 듯 보이는 밤하늘의 별들도 철저히 혼자이며, 하나의 점으로 응축되어 있던 물질들이 팽창하는 우주 속에서 빠른 속도로 서로에게서 멀어져 가고 있다는 사실은 내가 어린 시절부터 줄곧 느껴왔던 슬픔을 설명해주는 것 같았다. 

p.158

 

어린 시절, 나도 똑같이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위로받았던 경험이 있다. 까마득할 정도로 무한한 우주의 별을 상상하다 보면 나에게 닥친 고민쯤은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지니까. 세상에서 보이지 않는 점이 되어버린 듯한 아득한 기분은 의외로 자유로운 기분을 주었다. 나 하나쯤 아무렇게나 살아도 상관없지 않을까 싶은 뜬금없는 용기를 주기도 하고. 

엄마는 평범하게 사는 것이 제일 좋은 삶이라고 말했었다. 아빠와의 결혼으로 자신도 평범한 가족을 꾸리게 되어서 좋았다고 이야기했었다. 그런 말을 습관적으로 하던 엄마를 예전에는 잘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나는 머릿속에 동그라미 하나를 그리고 그 안에 평범이라는 단어를 적었다. 다른 사람들과 다르지 않은 삶, 두드러지지 않은 삶, 눈에 띄지 않는 삶, 그래서 어떤 이야깃거리도 되지 않고, 평가나 단죄를 받지 않고 따돌림을 당하지 않아도 되는 삶. 그 동그라미가 아무리 좁고 괴롭더라도 그곳에서 벗어나서는 안 된다는 것이 엄마의 믿음이었는지도 모르겠다고, 나는 잠든 엄마의 숨소리를 들으며 생각했다. 

p. 271

 

살다 보면 특이하게 사는 것보다 평범이라는 동그라미를 벗어나지 않고 남들과 똑같은 모습으로 사는 것이 훨씬 어렵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 평범한 삶이라는 환상이 때로는 내가 원하지 않는 선택을 하도록 만들기도 하고, 결국엔 그 선택으로 인해 평범이라는 테두리에서 벗어나게 돼버리기도 하니까.  

 

대를 이어 내려오는 거대한 슬픔과 상처의 타래에서 평범한 동그라미 안으로 들어가려는 노력은 때로는 더 큰 상처를 남기기도 한다. 나의 진정한 욕구를 돌아보지 않고 적절한 행복을 찾아 타협하는 순간 그 안에서 또 불행해져 동그라미 밖으로 튕겨져 나올 테니까. 


슬플 때 함께 울어주는 소설, 밝은 밤

최은영 작가의 밝은 밤은 최근 29회 대산문학상의 소설 부분 대상을 받기도 했다. 그만큼 소설로서 작품성을 인정받았다고 볼 수 있다. 이야기로서도, 세밀한 감정 묘사로서도 너무 재밌고 좋았던 소설이었다. 

소설을 읽는 동안 몇 번이나 눈물을 훔쳤고, 내 마음을 그대로 퍼갔나 싶을 만큼 공감되는 구절도 많았다. 특히나 관계에서 오는 미묘한 감정, 내면의 생각을 표현한 부분들을 읽을 때면 영혼의 결이 같은 친구랑 손을 맞잡고 눈을 마주치며 끄덕이고 있는 기분이 들 정도였다. 

이야기 속에 등장했던 증조모, 고조모의 삶과 그들의 친구 새비 아주머니와 희자와의 아름다운 우정도 실감 나고 세밀하게 표현되어 있어 내가 모르는 장소와 시간대를 직접 경험해본 느낌이었다. 다만 아쉬웠던 건 이야기 전체에서 인물을 칭할 때 그들의 이름이 아니라 화자인 지연(나)을 중심으로 계속 증조모, 고조모, 할머니로 부르며 긴 이야기가 이어져 그 부분이 살짝 헷갈리기도 피로하기도 했다. 액자 형식으로 떼어내 호칭을 좀 더 다르게 붙일 수는 없었을까? 

아무튼 너무나 좋아서 사자마자 이틀 만에 후루룩 읽어버리고도 쉽게 떠나보내기 아쉬운 소설이다. 슬플 때, 위로받고 싶을 때, 내 안의 슬픔의 정체를 알고 싶을 때 꼭 읽어보길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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