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단한 영어공부 :: 영어를 잘하려면 모국어도 잘해야 한다

한동안 너무 영어만 파고든 것 같다. 작년 새해 다짐처럼 시작된 영어공부는 어느새 일 년을 넘어 2년째를 향해간다. 스스로 오랫동안 꾸준히 해온 것에 대해 쓰담쓰담을 해주고 싶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조금 걱정되는 부분도 있었다. '과연 나는 잘하고 있는 것인가' 그건 영어공부 효과에 관한 질문이기도 하고, 내 생활 전반에 관한 질문이기도 했다. 영어공부를 제대로 해보기로 한 후 내 생활은 대부분 영어를 중심으로 재편성되었다. 시간이 날 땐 무조건 미드를 보거나 들을 것, 책을 읽을 거면 원서를 읽을 것. 미드는 거의 반드시 무자막으로 볼 것. 이런 거의 강제적인 규칙은 분명히 나를 영어에 익숙해지도록 만들어주긴 했다. 살면서 내가 미드를 무자막으로 볼 수 있게 되리라곤 생각 못했으니까. 

그런데 최근들어 너무 영어에만 신경 쓰느라 한동안 꾸준히 해오던 한글책 독서를 등한시하게 된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영어에 모든 시간을 쏟느라 독서에 들일 시간이 부족했고, 심지어 한글을 듣고 보는 것에 죄책감까지 느낄 정도였으니까. 그 생각에 대해 최근 약간의 위기감이 들어 며칠 전 고민하다가 매일 하는 루틴에 한글책 독서를 집어넣었다. 요즘 매일 지키고 있는 루틴 중에 영어 원서 필사, 영어 원서 읽기가 들어있기 때문에 독서를 전혀 하지 않는 건 아니지만 영어공부를 위해 흥미롭고 쉬운 이야기 위주의 원서만 주야장천 읽는 것과 조금 더 깊은 의미가 담긴 한글책을 꾸준히 독서하는 건 조금 다른 얘기다.  그래서 오늘 <단단한 영어공부 : 내 삶을 위한 외국어 학습의 기본>을 읽었다. 한글책 독서를 할랬는데 아이러니하게도 또 영어공부에 관한 책이다. 그런데 이 책을 읽으면서 그동안의 내 생각을 뒤엎는 영어공부에 대한 관점을 많이 발견하고 깨달은 바가 많아 공유해보려 한다. 

 

영어를 습득하는 관점 VS 영어를 대자연처럼 누리는 관점 

영어교육학에서 습득에는 다음과 같은 의미가 들어있습니다. 

1) 외부에 취해야 할 대상이 있다. 
2) 학습자는 이를 자기 내부로 가지고 들어온다. 
3) 외부 대상은 이제 자신의 소유가 된다. 
4) 따라서 언어 습득은 소유물을 점차 늘리는 일이다. 

이는 외부에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정보가 개인의 소유가 된다는 관점입니다. 반면에 언어 학습에서 생태적 접근을 추구하는 관점에서는 언어를 금이나 석유 같은 자원보다는 대자연과 같은 환경에 가깝게 봅니다. 이에 따르면 언어는 취해야 할 자원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환경으로, 특정 언어와 학습자를 소유가 아니라 관계 relation의 관점에서 파악해야 합니다. 우리가 세계를, 산과 바다를 소유할 수 없듯 언어는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누리는 것입니다. '누림'이 학습의 중심이 된다면 많이 가지고 적게 가지고는 그리 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더 많이 소유하려 조바심을 낼 필요도 없습니다. 세계는 언어로 충만하고 우리는 그것을 잘 누리면 되니까요. 중요한 것은 그 언어와 내가 엮이는 방식, 내가 그 언어를 통해 하고자 하는 일, 그 언어가 나의 정체성에 미치는 영향입니다. 결국, 내 삶과 해당 언어가 맺는 관계를 살펴야 합니다. 

<단단한 영어공부 : 내 삶을 위한 외국어 학습의 기본> 본문 중에서

보통 영어공부에 대해 학습과 습득을 비교하는 사례가 많다. 영어는 언어이므로 학습보다는 습득을 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많기 때문에 나도 그 의견에 따라 최대한 언어가 자연스럽게 습득되도록 내 생활의 많은 부분을 영어로 바꾸려고 노력했다. 그 노력의 결과로 나는 온전히 영어를 누리고 즐길 수 있게 되었을까? 애석하게도 아직 그 수준은 못 간 것 같다. 영어가 예전보다 편하고 익숙해지긴 했지만 더 잘하고 싶고, 더 많이 알아야 한다는 압박감은 오히려 커졌다. 내가 들인 노력과 시간만큼 바라는 결과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하여 미드를 온전히 즐기는 마음으로 보지 못하고 답답함을 무릅쓰고 무자막으로 보려고 한다던가, 내가 모르는 표현을 찾고 정리하는데 온 마음과 시간을 쓰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공부하는 과정에서 뿌듯함과 즐거움을 느끼는 시간도 물론 있었지만, 슬럼프가 없었다고 한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내가 이 영어를 구체적으로 어떻게 누릴 것인지에 대한 목표가 명확하지 않은 상태에서 무작정 영어를 꾸역꾸역 삼키려고 한건 아닐까. 이번만큼은 영어공부를  포기하지 않고 오래오래 지속하고 싶기 때문에 이 문제는 나한테 중요하다. 

 

크라센의 인풋 가설로 인한 '몰입교육'의 폐해

크라센의 언어학습 이론은 우리 사회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영어는 인풋이다"라는 말을 대중에게 각인시켰고, 그의 이론에 등장하는 다양한 개념은 영어교육과 관련된 효율적인 소통의 기초가 되었습니다. '인풋'이나 '습득', '이해 가능한 인풋' 등의 용어를 통해 원활한 대화가 가능해졌지요. 

하지만 부정적 영향도 무시할 수 없습니다. 언어교육의 복잡다단한 측면을 '인풋'이라는 말로 압축시킴으로써 영어교육에 대한 풍성한 논의를 막았고, 여러 부작용도 불러일으켰습니다. 그중 하나가 몰입교육에 대한 오해입니다. 

몰입교육이란 교육 내용을 목표 언어로 가르치고 배우는 학습법입니다. 영어와 불어, 두 언어를 동시에 배우고 사용해야 하는 캐나다에서 1960년대에 시작되었습니다. 사회문화적 필요에 의해 도입된 캐나다와는 달리 한국에서 몰입교육은 인풋의 획기적 증대를 염두에 둔 것이었지요. 그 결과 균형 잡힌 교과 학습을 통해 아동의 지적ㆍ정의적 발달을 꾀하기보다는 언어 입력의 양을 늘리는데만 급급한 경향을 보입니다. 

(중략)

몰입교육에 대한 잘못된 이해와 기대는 크라센의 인풋 가설이 한국에 미친 악영향을 방증합니다. '인풋이 모든 것'이라는 믿음은 영어교육과 관련된 논의를 앙상하게 만들어 버렸습니다. 전인적 성장과 외국어 교육, 한국어와 영어 구사 능력의 균형적 발달, 한국의 사회문화적 환경에서 영어의 역할, 새로운 언어를 통해 변신하는 자아 등에 대한 고민은 희박해졌습니다. '어떻게 언어 노출을 최대한 늘릴 것인가'라는 질문에만 매달리게 된 것입니다. 

언어량에 대한 집착이 양질의 경험에 대한 궁리를 압도하는 시대에는 영어공부의 핵심이 '인풋의 양'으로 수렴됩니다. 어려서부터 최대한 '넣어주어야만' 원어민 같은 영어실력을 가질 수 있다는 마케팅 담론이 힘을 발휘합니다. 바이링궐에 대한 그릇된 믿음이 사람들의 마음을 파고듭니다. 일상을 풍요롭게 하는 영어공부가 아니라 '인풋의 최대화를 통한 영어훈련'이 화두가 되고, '인풋'과 '원어민처럼 하기'라는 두 가지 사고의 축이 득세하면서 영어공부의 수많은 가능성을 삼켜버립니다. 

나도 크라센의 '인풋' 가설을 보고 큰 감흥을 받아 인풋에 기반을 둔 영어공부에 집중을 했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크라센의 '인풋' 가설이 잘못됐다는 말이 아니라 그 가설을 기반으로 '사회 역사적 필요에 의해' 캐나다에서 만들어진 '몰입교육'이라는 제도를, 캐나다와 전혀 다른 환경인 우리나라가 비판없이 받아들였다는 점에 있다. 외국어를 배우는데 인풋이 중요하다는 점에는 변함이 없지만, 모든 지식을 외국어로 배울 필요는 없다는 점이다. 영어공부를 위해 영어로 수업을 하는 건 맞는 방법이지만, 예를 들어 수학이나 과학, 역사를 영어로 공부한다고 생각해보면 너무나 비효율적인 것이다. 이 경우엔 교과목과 영어 둘 다 놓칠 수도 있을 것 같다. 모국어로 듣는 것도 힘든 수업을 외국어로 들으면 과연 몇 퍼센트나 온전히 이해할 수 있을까. 

나 같은 경우도 영어공부를 시작한 후 웬만하면 원서만 읽으려 하기도 했고, 영어소리에 최대한 집중하기 위해 모든 미드를 무자막으로 봤는데, 그러다 보면 내가 들을 수 있는 수준의 미드만 찾게 되므로 고를 수 있는 장르의 폭이 확실히 좁아진다. 그러다 보면 내가 접하는 책과 드라마의 폭이 한정되고, 그 장르 안에서도 디테일한 이해를 통한 재미를 찾기는 어려워진다. 대략적인 이야기를 따라갈 수는 있지만 디테일을 100% 파헤치려면 시간을 들여 공부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서 미드를 취향대로 선택할 수 있는 권리한글책 독서 시간이 줄어들면서 마음속에서 불안과 불만이 알게 모르게 자라났던 것 같다. 나는 영어를 잘하고 싶은 것도 맞지만, 한국말도 잘하고 싶고, 한글 글쓰기도 잘하고 싶고, 수많은 독서를 통해 마음의 양식을 쌓고 싶기도 하기 때문이다.

애초에 영어도 언어이기 때문에 생각의 기반이 있어야 잘 말하는 것이 가능하다. 영어를 잘하고 싶으면 말할 수 있는 콘텐츠가 있어야 한다. 한국말로 자신의 생각을 잘 말하지 못하는 사람은 당연히 영어로도 말을 못할테니까. 한국어 기반으로 이미 성인이 되어버린 내가 영어를 아무리 많이 듣는다고 해도 생각의 체계가 원어민처럼 바뀌지는 않을 것이다. 아이들의 경우 뇌가 유연해 바뀔 수 있겠지만, 국내의 한국어 기반으로 살고 있는 성인의 경우 아마도 훈련을 통해 최대한 영어에 익숙해지도록 만드는 것이 최선의 방법일 것 같다. 

 

영어를 효율적으로 받아들이는 법

핵심주제나 배경지식을 알고 읽기에 임하는 경우와 그렇지 않은 경우에 이해 속도와 깊이에는 큰 차이가 나타날 수밖에 없습니다. 흔히 영어로 글을 읽는 일은 단어를 하나하나 읽어 내서 더 큰 내용을 만들어나가는 상향식 정보처리로 이해됩니다. 벽돌 하나하나와 같은 단어들이 쌓이고 쌓여 큰 건물과 같은 글을 이루는 셈이지요. 단어들이 모여 문장이 되고, 문장들이 모여 문단을 이루며, 문단들이 모이면 글을 구성하므로 단어를 잘 이해하면 전체를 이해하는 데에 큰 문제가 없다고 봅니다. 

하지만 스키마 이론은 읽기가 관련 경험과 지식을 통해 지문을 이해해 나가는 하향식 정보처리를 수반한다는 점을 잘 보여즙니다. 특정 지문이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는지 감을 잡을 수 있고 그에 대한 배경지식이 풍부하다면, 단어가 조금 어려워도 글을 이해할 가능성이 높아집니다. 
글을 읽고 이해하는 데에는 상향식과 하향식 처리과정 모두가 중요하며 서로 긴밀한 영향을 미칩니다. 읽기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이 사실을 강조하며 '상호작용적 정보처리'라는 개념을 사용합니다. 영어로 글을 읽는다고 해도 배경지식의 중요성은 간과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배경지식을 쌓을 때 가장 효율적인 방법은 영어로 읽기가 아닙니다. 단시간에 지식을 쌓으려면 해당 분야의 책을 읽는 것이 가장 효율적이고, 이를 해낼 수 있는 가장 좋은 도구는 외국어가 아닌 모국어이기 때문입니다. 단위 시간당 정보 처리량을 생각하면 외국어와 평생 써온 우리말은 비교가 될 수 없지요. 

많은 이들이 이 점을 놓칩니다. 끈기를 가지고 읽기를 완수하는 분도 있지만, "영어공부는 무조건 영어로"라는 슬로건을 맹신하여 모르는 단어투성이 지문과 씨름하다가 제풀에 나가떨어지는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영어로 읽는 이유가 "영어공부"에도 있지만 '내용의 이해'에도 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상향식 처리만을 고집하여 "오로지 영어로!"를 고수하는 전략보다는 한국어로 견실한 배경지식을 쌓아 하향식 처리의 효율성을 높이는 전략이 현명합니다. 복잡하고 난해한 전문 영역을 공부하는 경우라면 더욱 그렇습니다. 

이 부분은 읽기 뿐만 아니라 듣기에도 해당될 것 같다. 예를 들어 한글자막으로 한번 봤던 미드는 오랜 시간이 지나 무자막으로 봐도 훨씬 영어가 잘 들리고 쉽게 느껴진다. 또한 책으로 이미 이야기가 많이 알려져 익숙한 이야기로 만든 미드나 영화를 볼 때도 마찬가지다. 처음 보더라도 전체적인 흐름을 알기 때문에 훨씬 따라가기가 쉬운 것이다. 원서를 읽을 때도 만약 전공분야라 잘 알고 있는 부분에 대한 원서를 읽을 때는 훨씬 쉽게 읽힐 것이다.

나는 원서의 경우, 욕심 부리지 않고 흥미위주의 재밌는 소설만 골라 읽었으므로 앞으로도 쭈욱 이렇게 해나가면 될 것 같다. 다만 읽으려다 단어 수준이 어려워서 내려놨던 소설책은 한글 번역본을 먼저 읽은 다음 원서를 다시 도전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영어를 더 잘하게 되면 그때 읽어야지'라고 생각했는데 '그때'는 언제 올지 모른다.  

어떤 주제에 대해 전체적인 틀이 머릿속에 이미 있다는건 굉장한 메리트다. 국내에 유통되지 않는 새로운 분야의 지식을 가장 먼저 알고 싶어서 영어를 공부한다고 치자.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 분야의 기본 내용에 대해서는 미리 알고 있어야 그 지식을 찾을 수 있고, 읽었을 때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그 배경지식을 배울 수 있는 가장 빠른 방법이 바로 우리의 모국어인 한국어로 된 책이나 자료를 보는 것이다. 

영어는 짧은 기간 강하게 몰아쳐야 어느 정도 빠른 효과를 볼 수 있으므로 어느 정도의 기간동안은 다른 공부를 제쳐두고 투자할 가치가 있다. 하지만 길게 오랫동안 지속하는 단단한 영어공부를 하려면 단순히 영어를 보고 듣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그 속을 채울 콘텐츠도 꾸준히 한국어로 주입해줘야 하는 것이다. 평소 꾸준히 한국어로 생각을 정리하는 습관을 기르고, 다양한 배경지식을 쌓은 다음 그 부분에 대해 영어로 표현하는 법을 익히면 훨씬 빠르게 오랫동안 꾸준히 나아갈 수 있을 것 같다. 

엄청난 영어 인풋이 필요한 이유(영어 리스닝편)

영어공부는 빨리 가는 것보다는 오랫동안 꾸준히 가는 게 중요하다. 또 누구에게나 100% 맞는 방법도 없다. 꾸준히 나를 돌아보면서 나에게 맞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내 영어공부 방법에 의문이 생길 때마다 꾸준히 의심해보며 더 나은 방법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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