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의 공부법! 계속 공부하는 삶이 필요한 이유 (feat. topclass)

밀리의 서재에서 잡지를 둘러보다가 우연히 톱클래스라는 잡지를 보게 됐어요. 달마다 다른 주제를 가지고 인터뷰 형식의 글을 잡지로 내는 것 같은데 최근호의 주제가 바로 어른의 공부법이었지요.

요즘 한참 "나는 대체 왜 계속 공부를 하는가, 시키는 사람도 없구만." 이라는 생각을 자주 했었는데요. 뭔가 결핍을 채우려는 것처럼 자꾸 이것저것 공부하고 있다는 느낌도 들었거든요. 그래서 거기에 대한 해답을 찾고 싶어서 읽었다가 좋은 구절 체크해 둔걸 한번 소개해보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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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의 공부법

 

공부하는 어른은 무엇이 다른가

공부가 깊은 이의 언어는 섬세하다. 

공부를 깊게 한 사람은 대체로 어휘 사용에 신중하다. 행복과 불행, 성공과 실패, 좋은 대학과 그렇지 않은 대학 등의 개념을 세간의 관습대로 사용하지 않고 자신만의 개념으로 해석해서 받아들이는 경향이 강하다. 즉 섣불리 일반화하지 않으며 단정이나 규정짓는 걸 조심스러워한다. 세상에 대한 경험적 지식이 쌓일수록 세상은 모순과 혼란으로 점철돼 있다는 것을 인식하게 된다. 완벽한 성공이란, 완전한 행복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같은 언어를 사용해도 사람과 상황마다 제각각 다른 뜻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거칠게 일반화해도 좋을 만큼 인간의 삶은 단순하지 않다. 지식이 깊어지면 대상을 섬세하게 구별할 수 있게 된다. 잘 모르니까 구별이 안 될뿐, 알게 되면 미세한 차이를 감지할 수 있다. 섬세한 구별 없이 문명은 존재할 수 없다. 

세상 경험이 쌓일수록 세상이 내 생각만큼 단순하지 않다는 것을 깊이 느끼게 됩니다. 오히려 지금껏 내가 생각했던 세상과 실제의 세상은 정반대같다는 생각도 들더라고요. 그래서 점점 습관적인 고정관념에 대해 고민하게 됩니다. 그리고 눈으로 보이는 것 저너머의 것에 대해서도 더 생각할 수 있게 되더라고요.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라는 것, 세상에 완벽한 것은 없다는 것도요. 지식이 깊어지면 이런 대상을 섬세하게 구별할 수 있게 된다니 멋집니다. 세상을 보는 눈이 한 차원 높아진다는 것이겠죠. 나이브하게 사람들이 떠드는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던 '나'와 한걸음 떨어져서 진실을 구별할 수 있게 되는 '나'는 정말 다른 '나'겠죠. 섬세한 사람이 되고 싶어서 더 많이 공부하고 싶습니다. 

 

진정한 행복을 느껴보고 싶다면 고통을 감내하라

최선의 고통, 공부는 즐거운 것이 아니라 견디는 것

언어심리학자인 폴 블룸 미국 예일대 교수는 신간 <최선의 고통>에서 독특한 행복론을 펼쳤다. 행복이란 고통이 없는 안락한 상태가 아니라 오히려 고통에서 얻는 기쁨이 크다는 것. 쾌락이 인간의 궁극의 목적이라면 설명되지 않는 부분이 너무 많다. 목숨을 걸고 해발 8000m의 고봉을 오르는 알피니스트, 신체의 극한을 경험하는 마라토너등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폴 블룸 교수는 인간이 의미를 창출하기 위해 고통을 참고, 그것을 기꺼이 감내했을 때 느끼는 성취감은 평온한 상태에서는 결코 느낄 수 없는, 차원이 다른 행복감이라고 말한다. 즐기면서 하는 공부의 순간은 길지 않다. 새로운 것을 알아가는 앎의 기쁨도 있고, 궁금한 것의 해답을 찾아냈을 때의 지적 쾌감도 있지만 이런 환희의 순간은 찰나에 불과하다. 자신의 몸을 가두고 오랫동안 집중하는 공부의 시간은 '선택적 고난'의 시간이자, 견딤의 시간이다. 

한때 거의 중독처럼 다양한 자격증을 공부해서 취득했던 적이 있는데요. 친구들이 자격증 따는게 취미냐고 할 정도였어요. 굳이 실용적인 목적을 위해서 따는 게 아니었거든요. 그냥 진득하게 앉아서 인고의 시간을 견디며 일정 시간 공부를 하며 합격이라는 성취감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었어요. 그때는 그냥 뜻 모를 성취감에 목말라 있었나 봅니다. 공부하는 게 정말 싫은데도 자격증 하나를 따고 나면 또 다른 자격증을 찾아보고 있었으니까요. 물론 여기서 말하는 성취감은 이런 얕은 수준의 공부 후 맞이하는 성취감을 말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어쨌거나 그때는 내 고통의 시간을 성취감이라는 하나의 카드와 바꾸는 시간이었던 것 같아요. 힘들지만 또 느끼고 싶기에 자꾸 도전했던 거겠죠. 지금 내가 하고 있는 다양한 공부들도 마찬가지일 거고요. 새로운 것을 알아가고 더 발전한 나를 만나보고 싶기 때문에 힘든데 자꾸 공부를 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근데 왜 학창 시절에는 이렇게 열심히 안 했니,,, 과거의 나야,,,,)

 

 

정신은 그대로인데 몸만 커다랗게 자라버린 어른들에게 

 한국 사회는 그 고민의 시간을 기다려주지 않아요. 빨리 철들길 강요하는 사회죠. 마치 초본식물처럼

초본 식물은 환경이 안 좋으니 3월이 되자마자 푸르러지면서 바로 씨를 만들어요. 지금 우리 사회는 모두가 초본식물처럼 되어가고 있어요. 빨리 철들지 않으면 인생의 리스크가 너무 크니까. 실패할 기회를 안주면서 빨리 철들길 바라요. 그런 과정을 거치지 않고 초, 중, 고교, 취업까지 이어지다 보니 40대에 와서 진짜 고민이 시작되는 경우가 많아요. 

<라틴어 수업, 한동일 변호사 인터뷰중에서>

한국사회는 고민할 시간을 주지 않는다. 어릴 적 내가 진짜 뭘 잘하고, 뭐가 되고 싶은지에 대해 한 번도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떻게든 대학만 가면 그 뒤는 누군가 해결해주는 줄로만 알았다. 좋은 대학, 좋은 직장 모두가 같은 목표를 가지고 뛰는데 왜 그걸 원하는지에 대한 이유는 없다. 그냥 거기 가면 연봉을 많이 주니까. 사실 돈이라는 건 정말 깨지기 쉬운 목표다. 돈을 너무 많이 벌어도, 너무 적게 벌어도 각자의 이유로 지친다. 어릴 때는 어딜 가면 돈을 많이 벌 수 있을까만 생각했다면 지금에 와서야 내가 뭘 해야 진정 재밌게 일할 수 있을까를 고민한다. 내가 뭘 좋아하고 재밌어하는지 알고 싶어서 자꾸 이것저것 기웃거리고 관심 가진다. 10대쯤에 했어야 할 진로 고민을 40대를 눈앞에 두고 있는 시점에 하기 시작한다. 

 

어디서 터질지 모를 공부의 씨앗을 마구마구 뿌릴 것

내가 100을 준비해서 100이 나오길 바라는 마음은 도둑놈 심보예요. 그런 일은 결코 없어요. 공부라는 건 100을 준비해서 20을 발휘하는 것이에요. 요즘 노란 송홧가루가 많이 날리지요. 저 작은 가루가 어디에 떨어져서 생명의 씨앗을 만들어낼지 알 수 없지만, 그것 하나를 위해 사방을 뒤덮는 거예요. 아스팔트, 돌길 위 할 것 없이. 그런데 인간은 어떤가요? 하나를 해서 하나의 결과를 내려한다면 그게 도둑놈 심보 아닐까요? 공부란 무작위로 뿌려서 그게 나의 어디에서 포텐이 터질지 알 수 없는 기회를 기다리며 하는 거예요. 모든 건 운인제, 운을 만들어가는 게 우리가 할 일이에요. 

<라틴어 수업, 한동일 변호사 인터뷰 중에서>

지금까지 내가 했던 게 바로 100을 준비해서 100이 나오길 기다린 마음이었던 것 같다. 아니, 어쩌면 50을 공부하고 100이 나오길 기다렸던 것 같기도 하다. 그런데 100을 공부하고 20만 발휘하면 된다니. 어떤 걸 공부하던 그것은 어딘가에 도움이 된다. 지금까지 내가 배우고 익혔던 것들은 대부분 나중에라도 어딘가에 도움이 됐던 것 같긴 하다. 근데 무엇을 공부하고 그걸로 100의 성과를 기대하진 말자. 어쩌면 무용하다고 생각하는 공부가 가장 가치 있을 수도 있다. 당장 어디에 써먹을지 알 수도 없고, 경제생활에 딱히 도움이 안된다고 할지라도, 언젠가 터질 나의 포텐을 위해  꾸준히 쌓아나가는 것이 중요하다. 

 

꾸준히 공부하는 어른은 멋있다. 어디서든 배우려는 자세를 가지고 꾸준히 책을 읽고, 외국어를 공부하고, 신문을 읽고, 새로운 기술을 배운다면 언젠가는 거기서 또다른 삶의 의미를 발견할 수도 있다. 나도 조바심 가지지 말고 즐기면서 공부해야지. 모든 공부는 가치가 있다. 세상에 완전 무용한 공부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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