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이달》가쿠다 미쓰요 :: 돈이 주는 마약같은 가짜 행복

모든 사람들이 돈을 버는 것에 지금처럼 열광하던 시기가 요 근래 있었던가. 주식, 재테크 서적이 서점에서 베스트셀러를 차지하고, 모두가 어떻게 하면 많은 돈을 벌 수 있는지에 대해서만 궁금해하고 열중한다. 집값이 미친 듯이 치솟고, 주식과 코인이 널뛰기를 하는 동안 누군가는 어마어마한 돈을 벌어 집과 차가 바뀌고, 누군가는 돈을 다 잃고 절망에 빠진다. 이런 분위기 가운데 돈에 지배당하는 사람들에 대한 소설인 가쿠다 미쓰요의  '종이달'이 눈에 띄었다. 서재 책장에 꽂혀있는 책을 우연히 빼들고 작가의 말부터 읽었는데 돈에 관한 소설이라는 사실을 알고 바로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종이달 : 가쿠다 미쓰요
가쿠다 미쓰요 :: 종이달


종이달은 1990년대 후반 일본의 거품경제가 꺼져가던 시점을 배경으로, 은행에 시간제 아르바이트로 취업하게된 전업주부 리카가 1억 엔이라는 거액의 돈을 횡령한 과정에 관한 소설이다. 1억 엔이면 우리 돈으로 10 억정 도고, 20년 전 배경이라 가정하면 아마도 지금의 10억보다도 훨씬 큰 가치를 지닌 돈이었을 것이다. 평범한 가정주부였던 사람이 어떤 계기로 그런 큰돈을 횡령하게 됐는지, 그리고 그 돈을 도대체 어디에다 쓴 건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책에는 리카를 기억하는 친구들도 다수 등장하는데, 그들이 기억하는 리카는 예쁘고 어른스러웠으며 횡령 같은 일은 절대 저지를 리 없다고 생각될 만큼 착한 사람이었다.  

 

파멸의 시작...


이 모든 것은 일상의 작은 균열에서 시작되었다. 첫 월급으로 남편에게 사준 저녁식사에서 남편이 보인 미묘한 무시의 말투, 어느 무더웠던 날 우연히 들른 백화점 화장품 코너에서 영업을 당해 화장품을 사려다 돈이 부족해 고객의 돈에 잠깐 손을 댔던 일, 그리고 고객의 집에 영업하러 갔다가 우연히 만나게 된 대학생 고타. 모든 상황이 맞물려 리카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아니 어쩌면 무언가에 이끌리듯이 위조 문서를 만들고 고객에게 거짓말을 하고 그들의 돈을 빼돌려 자신이 원하는 곳에 쓰기 시작한다. 분명 처음엔 선의였다. 잠깐만 가져다 쓰고 금방 갚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리카는 소비자금융에서 돈을 빌리며, 자신이 무슨 짓을 하는지 어렴풋이 깨달았다. 뭔가 말도 안되는 짓을 하고 있다. 그것은 지금까지도 알고 있던 일이었다. 하지만 그때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지금 자신이 발을 들이밀고 있는 터무니없는 사태에서 되돌아갈 수는 없다. 지금까지는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주택 대출금은 이제 없다. 그걸 내던 금액, 월급의 일부를 계속 갚으면 언젠가 '빌린' 돈은 모두 갚을 수 있다고. 그러나 그런 일은 불가능하다는 걸, 이때 막연히 생각했다. 이미 자신이 얼마를 썼는지, 얼마를 갚으면 되는지 알지 못했다. 

가쿠다 미쓰요 <종이달> p.300 
 

한번 고삐가 풀린 씀씀이는 멈출수가 없게 돼버렸다. 누군가가 그녀에게 무언가를 사달라고 했거나 강압적으로 시킨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한번 살짝 봐버린 짜릿한 소비의 맛은 쾌락의 맛과 비슷했다. 돈 없는 대학생 고타의 빚을 대신 갚아주고, 옷을 사주고, 여행을 보내주고, 나중엔 집과 차까지 사준다. 부자 사모님인 것처럼 보이는 자신이 나쁘지 않다. 고타의 젊음에 뒤쳐지고 싶지 않아 리카 자신도 백화점에서 최고급 옷을 사고, 매주 에스테틱을 받고, 고타와 호텔 스위트룸에서 시간을 보낸다. 하나에서 시작된 소비는 점점 스스로를 속이고 마비시켜 그것이 원래의 현실인 듯 착각하게 만들고 자신이 쓰는 돈이 어디서 왔는지 잊어버리게 된다. 점점 구멍 나는 돈 때문에 거짓말이 거짓말을 낳고 점점 파멸의 길로 간다. 

 

종이달은 평범했던 주인공 리카가 돈에 의해 어떻게 파멸의 길로 가는지 하나하나 생생하게 보여준다. 처음부터 악의 따위는 없었음에도 돈이 오가는 통로를 너무 잘 알기에 돈이 주는 달콤함에서 빠져나오지 못한다. 속으로는 '제발 누군가 내가 한짓을 차라리 알아차려줬으면' 하고 바랄 정도로 괴로워하면서도 말이다.  돈은 그렇게나 강력한 존재다. 내 돈이 아님에도 내가 손댈 수 있는 곳에 있다는 이유만으로도 인간은 이성을 잃을 수도 있다. 아무리 착실하고 선한 인간이었더라도 말이다. 

 

종이달이 의미하는 "가장 행복했던 가짜 시절"


이 소설의 제목인 종이달은 '가짜'를 의미하기도 하지만, 한때 일본의 사진관에서 가족과 연인들이 종이달을 배경으로 사진을 많이 찍었다고 해 은유적으로 '가장 행복했던 한 때'를 의미하기도 한다고 한다. 주인공 리카는 어쩌면 "가장 행복했던 가짜"를 경험한 셈이다. 언제 끝날지 모르지만 그 끝은 불행할 것이 뻔한, 지금까지 가졌던 모든 것까지 다 버려야 하더라도 절대 끊을 수 없는 마약같은 행복

 

돈이 주는 그 짜릿한 달콤함을 알고 있기에 나쁜짓이란걸 알면서도 조금쯤은 공감할 수밖에 없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한편 이 소설에는 너무 절약을 열심히 해서 돈을 목숨처럼 여기는 리카의 친구 '유코'도 등장한다. 과도한 과소비와 대비되어 근검절약이 언뜻 바람직해 보일 수도 있지만 과도하게 돈에 끌려다니는 절약 역시 좋아 보이지는 않는다. 

 

어떻게 돈을 써야 정말 잘 쓰는걸까? 잘 버는 것 못지않게 어려운 문제다. 뭐든 적당한 선을 지키는 게 어려우니까.  그래도 무엇보다 중요한건 돈을 쓰는 기준을 절대 남에게 두면 안된다는 걸 이 소설을 통해 다시 한번 배운 것 같다. 다른 사람에게 어떤 사람처럼 보이고 싶어서, 혹은 내가 돈으로 다른 사람을 움직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게 가장 바보 같고 위험한 생각이라는 것을. 

읽기의 말들 :: 책덕후의 찬란한 독서 예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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